Monday 13 October 2025
ohmynews - 3 hours ago
가족 없이 세상 떠난 독립투사 위해... 만해 한용운의 죽음 무릅쓴 용기
마침내 백서농장을 가다
필자는 2004년 5월에 안동 문화방송의 lt;혁신 유림 gt;이라는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역을 맡아 다시 3차로 동북 3성 일대를 답사했다. 그때 중국 신빈 거주 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인 조문기 교수의 안내로 본격 1차 답사 때 살펴보지 못한 백서농장 답사에 나섰다. 그해 5월 31일 일찍 신빈을 출발, 유하 현에 도착한 뒤 늦은 점심을 먹은 다음, 곧장 백서농장으로 달려갔다.
유하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통화로 가다가 안인(安仁)이라는 표지판을 3km 지난 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서부터 길은 몹시 험하고 차량 통행도 뜸했다. 백서농장이 있다는 쏘베차(小北岔)는 1914년 농장 건설 당시 백두산 서쪽 의 산속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 삼림지대라고 했던 바, 한 세기가 지난 그때도 첩첩산중의 오지였다.
그 들머리에서 40 여분을 더 달리자 따베차(大北岔) 마을 임장 초소가 나왔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주민들에게 쏘베차(小北岔)를 묻자, 그곳은 그 마을 어귀에서 다시 왼쪽 좁은 산길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데, 그곳에는 현재 중국군 특수부대가 주둔하기에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라고 했다.
수륙만리 먼 길을 찾아온 우리로서는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백서농장 현장을 가고자 했지만 길 안내자 조문기 교수는 현지인이 민간인, 특히 카메라를 멘 이국인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말을 듣고 더 이상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일송 김동삼은 어떤 분인가
1919년 2월 무오독립선언서 발표 이후 일송은 서로군정서 참모장(1919년), 대한통의부 총장(1922년), 상해국민대표회 의장(1923년), 전만통일의회 의장(1924년), 정의부 참모장(1925년) 등 독립운동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서로군정서 참모장 당시 일제 기록에 따르면, 일송의 지령으로 국경을 넘어 일경과 싸워 체포된 것만 7건 19명에 이르며, 13명의 일경을 사살했다. 정의부 참모장 때인 1925년 3월 초부터 국내 진공을 개시해 3월 19일에는 초산의 일제 추목주재소와 옹암주재소 등을 습격하여 일경 5명을 사살하고, 무기 다수를 노획해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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