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3 Octo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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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 3 days ago

공자와 단군, 최치원을 동시에 만나고 싶다면?

대개 전북 옥구는 몰라도 군산은 모두가 안다. 옥구는 천년도 넘은 오랜 지명이자 근방을 다스리던 치소가 있던 고을이고,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번창한 미곡 수탈 항구였으니 기껏해야 100년 남짓 된 도시다. 군산 땅의 진짜 주인은 옥구인데, 꼬리가 몸통을 집어삼킨 형국이다.

고군산과 신군산, 이름이 말하는 역사


기실 군산(群山)의 한자를 풀이하면 서해에 떠 있는 섬들 이라는 뜻이다. 군 은 무리지어 있다는 의미고, 산 은 섬을 말한다. 명명될 당시의 군산은 지금 고(古)군산 이 되었고, 여러 개의 섬이 늘어서 있다는 뜻을 이어 붙여 고군산 열도 로 불린다.

고군산 이 원래의 군산이고, 지금의 군산은 말하자면 신군산 쯤 되는 거다. 마치 위만조선과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 등과 구분하기 위해 단군조선을 고조선 으로 칭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하긴 부산과 동래, 목포와 무안 등 이와 유사한 사례는 전국적으로 드물지 않다.

군산 말고, 옥구를 찾아가는 길이다. 비옥할 옥(沃)에, 물길 구(溝)를 쓴다. 너른 들판을 적셔줄 물길이 사통팔달 뻗어있는 땅이라는 뜻이겠다. 통일신라 때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니, 농경 사회였던 당시 옥구가 얼마나 번성한 고을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도 옥구에는 인공적인 제방을 두르지 않은 저수지가 많고, 성곽의 해자나 유럽 도시의 운하 모양의 도랑이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해발고도가 20여 미터에 불과한 언덕이 고산 준봉처럼 높아 보일 정도를 평야도 드넓다. 탁 트인 시야가 짙푸른 가을 하늘 저리 가라다.

인간의 생로병사처럼 고을에도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급속한 변화 속에 지방의 중심지였던 옥구는 퇴락했고 지역의 소멸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을의 기능이 멈추고 사람이 떠난 땅엔 폐기물 매립지와 창고, 교도소 등 혐오 시설로 채워졌다.

옥구 향교, 잊혀진 고을의 자존심


과거 번성했던 시절의 옥구를 떠올릴 수 있는 유산은 딱 하나 남았다. 읍내 초입에 당당하게 선 옥구 향교가 그것이다. 향교는 조선 시대 지방의 공립 교육 기관으로, 현감이 파견된 고을에 동헌과 나란히 세워지는 게 보통이다. 향교가 있다는 건 제법 큰 고을이었다는 뜻이다.

동헌 자리에는 폐교된 상평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을 에워싼 산 능선을 활용한 옥구읍성의 자취가 또렷하다. 현재 옥구읍사무소 소재지는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선제리지만, 읍성이 헐리기 전까지 이곳이 지방관이 파견되어 근방을 다스리던 치소였다.

읍성의 남문 터엔 흉물스러운 녹슨 철길이 지나고 있다. 2000년대 초 폐선된 이후 잡풀만 우거져 방치되고 있지만, 6.25 전쟁 직후 미군의 군용 물자와 군산항에 선적될 화물을 실어 나르던 기차가 지나던 지역 물류의 대동맥이었다. 지금도 철길은 미군기지까지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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