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3 Octo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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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 3 days ago

한반도 최남단 해상 관문, 이진마을의 잊혀진 역사를 걷다


어제와 달리 청아한 날에 기분도 더없이 상쾌하다. 지난 9일 오전 7시30분, 다시 이진마을에서 걷기를 이어간다.

한반도 최남단의 해상 관문

이진마을은 군진이면서 한반도 최남단의 해상 관문이었던, 잊혀져선 안될 우리나라의 매우 중요한 마을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는 그가 쓴 지리지인 lt;대동지지 gt;에서 이진진은 한양에서 950리 떨어져 있고, 제주로 갈 사람은 모두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난다 라고 기록했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로 유배 갈 때 삼남길의 본토 종착점인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조선시대에 제주로 왕래하는 항구는 해남과 강진에 모여 있었는데, 이곳 이진포(조선시대엔 영암에 속함)와 해남 관두포, 강진 남당포 이렇게 3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정조 18, 1794)에 제주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이 왕래할 때에 강진, 해남, 영암이 도회를 나누어 정해서 각 1년씩 돌아가면서 거행한다 고 기록했다.

즉 세 곳이 윤번을 정해 공행公行을 관장·호송하는 도회지가 되었다. 특히 이진포는 본토 최남단 항구였기에 민·관이 두루 활용한 인기 항이었고, 주요 대로인 삼남길도 제주 길을 잇는 바로 이곳 이진포에서 시작됐다.

배가 강진 남당포에서 출발한 경우에도 이진포가 첫 기착지가 되곤 했다. 옛날엔 일기가 좋지 않은 때를 대비해 제주도로 가는 뱃길에 백도, 보길도, 추자도 등 여러 기착지를 두었다.

조선 시대 천재 시인이자 풍류 가객이었던 백호 임제는 제주도 기행문인 lt;남명소승南溟小乘 gt;에서 1577년 5월 강진 남당포에서 출발해 이곳 이진에서 배를 갈아타고 백도를 거쳐 제주 조천관에 이른 여정을 적었다. lt;남명소승 gt;은 본토인의 관점에서 제주의 풍물을 기록한 첫 문헌으로 16세기 제주 문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급한 바람 높은 돛 화살처럼 내닫는데
이 사람 우습네, 사나이라고 담력을 지녔는지
죽을 고비 열 번 넘기면서도 누워서 시를 짓고 있네
-백호 임제의 시
임제는 제주 뱃길 중에 심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조천관에 도착했다. 나는 마치 그네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배가 하늘에 떴다 물속으로 들어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날밤 저녁 간신히 조천관에 도착했는데, 함께 출발했던 여섯척의 배 중에 한척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는 글도 남겼다. 배 한 척이 행방불명됐지만 수색이나 구조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당시엔 바다에서 조난 당해 죽거나 표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 땅을 지켜온 원천은?

그러고 보니 옛 사람들의 삶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더 가까이 있었다. 약탈과 전쟁, 돌림병, 조난, 굶주림 같은 위험과 언제든 맞닥들일 각오를 해야 했다. 관직에 나갔어도 탄핵·유배·죽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상들의 억척 같은 삶의 태도는 오히려 이런 삶의 환경에서 나왔다.

운명 같은 날것의 삶의 환경에 항상 더 가까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 많이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했던 의지의 삶이었다. 외적의 침략 앞에 군사로, 의병으로, 독립투사로 나라와 가족을 위해 목숨 바친 결기도 죽음이란 선택을 항시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살자고 도망치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자신과 가문의 수치로 여겼고, 이는 분명한 의기로 표출됐다. 이 같은 억척과 결기, 그리고 의기가 우리 땅을 지켜온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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