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30 October 2025
ohmynews - 2 days ago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용히 북한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평양시민이던 김련희는 2011년 43살의 나이로 한국에 왔다. 두 달만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속아 밟은 땅, 그는 들어오자마자 국정원합동심문센터에서 북으로 돌아가겠다 고 말했다. 김련희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고 법질서를 잘 따르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국정원을 나와 하나원에 들어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육을 한 달간 받았다. 김련희는 정착 지원금 2백만 원을 들고 남쪽 세상에 발을 디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4년 동안, 김련희는 국정원에서 밝힌 대로 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했다. 번번이 좌절되었으나 김련희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평양에 사랑하는 딸 련금이와 남편이 있고 부모님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련희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자 남북 관계의 숨통이 트일 거라 내다보고 활발하게 움직인다. 주변에서도 힘을 보태 김련희송환추진위원회 (공동대표 함세웅 이해학 정인성 한문덕 문국주 김혜순)가 꾸려졌다. 8월 27일에는 추진위가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동포애 차원에서 김련희를 돌려보내자 라는 기자회견도 열었다. 김련희와 면담한 통일부 관리는 정동영 장관이 김련희의 송환에 적극 찬성한다 라고 확인해 줬다. 김련희가 10월 20일 면담한, 유엔인권서울사무소의 이메시 포카렐 부소장도 김련희의 송환을 인도적 차원에서 동의하고 한국 정부와 소통하겠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재명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 다를까
김련희는 올해 안으로. 14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을까? 의문도 든다. 정말 그가 간절하게 가족을 만나고 싶다면 베이징으로 가서 평양으로 가면 되지 않았을까?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압록강을 건널 수도 있고. 소리 소문없이 은밀하게 돌아갈 여러 방법이 있는데 왜 오랜 세월을 여기 머물렀을까?
김련희도 방법을 모르진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는 현재 출국금지 상태다. 김련희는 2016년 베트남대사관에 들어가 망명 신청을 했다. 베트남으로 간 뒤 북녘 땅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는 출국금지를 떠나 여권조차 없었기에 해외로 나갈 길을 찾다찾다 택한 방법이었다. 그는 주거침입을 했다고 연행되었고, 반국가단체가 장악한 지역으로 탈출을 꾀했다고 즉, 국가보안법상의 잠입탈출죄를 저질렀다고 기소되면서 출국금지를 당했다. 한국 사회에 편입되어 7년 만인 2018년에 여권은 나왔으나 출금에 걸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련희는 공소 취하를 요구한다. 자신이 대한민국의 안전에 해를 끼친 바가 없으니, 가족의 품으로 갈 길을 열어달라고 한다. 출국금지만 풀리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용히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겨, 추미애 국회 법사위원장도 10월 14일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정성호 법무 장관에게 인도적 조치를 요구했다. 대한민국은 김련희의 요구에, 이재명 정부는 김련희의 간청에 응답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 5년 동안에도 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재인은 집권하자마자 김정은과 함께 2018년 4·27 판문점회담, 그해 가을 평양회담을 열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듯했으나 양 정상은 김련희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김련희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범죄자였을까? 한국에 와서 돈을 벌길 희망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제는 50대 후반에 접어드는 평양시민이다. 그가 정녕 잠입·탈출 위반 이라는 엄청난 죄명으로 가둬둘 중죄인일까?
나한테는 왜 와이파이를 안 주는 겁네까?
대구는 김련희가 하나원을 나와 정착한 곳. 그는 김책공업대학의 양복사였다. 북의 경력을 살리면서 먹고 살 곳을 고민하던 중 대구가 패션의 도시라는 소리를 듣고 내린 결정이다. 정착 지원금을 들고 마련한 거처는 대구의 한 임대주택. 짐을 부려놓고 동네에 익숙해질 즈음, 여기저기 널린 카페가 김련희의 눈에 띄었다. 하나원에서도 커피숍 얘기를 익히 들어왔던 터. 어느 날 김련희는 커피 한 번 마셔보려고 용기를 내어 카페 문을 열었다.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니, 그의 눈에 와이파이 무료제공 이라는 글귀가 들어왔다. 초코파이와 찰떡파이는 평양에서 인기가 좋았다. 김련희 자신도 마시멜로의 부드럽고 찰진 맛, 찰떡의 쫀득함을 좋아했던 터라 와이파이가 초코나 찰떡과 비슷한 파이로 짐작했다. 그는 옳다구나 하고 기다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종업원은 와이파이 를 무료제공 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많다. 김련희는 혹시 오늘 준비한 양이 다 떨어진 걸까? 설명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아니면 겉보기에도 내가 북에서 온 사람으로 보여 무시하는 건가? 김련희는 저울질하다가 내일 다시 와 와이파이 를 먹기로 하고 일어났다. 카페를 나가려니 서운하고 은근히 속상해 그는 카운터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나한테는 왜 와이파이를 안주는 겁네까?
김련희는 지금도 당황하던 직원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이 외에도 그가 겪은 일이 많다. 한번은 하나원에서 만난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나들이를 할 때였다. 고속도로 요금소에 멈춰 돈을 건네는 모습에 김련희는 돈 받던 여성하고는 아는 사이예요? 왜 돈을 줬습니까? 라고 물었다. 통행료라는 설명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북녘에서 익힌 가치관으로는 도로공사 가 수익을 내야 하고 민자고속도로 구간은 통행료가 더 비싸야 한다는 남쪽의 상식 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내 나라 내 땅을 가는데 돈을 내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에서 본 폭탄세일 문구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상점 앞에 걸린 글귀 앞에 잠시 얼어붙은 적이 있었다. 아니, 가게에서 폭탄 까지 판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탈출을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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