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14 October 2025
ohmynews - 3 days ago
군창예기조합 은 군산권번 전신으로 추정
군산은 개항(1899년 5월) 이후 일본 사람만 몰려온 게 아니었다. 일제에 전답을 빼앗긴 농민들이 부둣가 노동자나 정미소 미선공이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가족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이주해왔다.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돈다발을 싸 들고 찾아온 사업가를 비롯해 요식업소, 숙박업소 주인도 다수 있었다.
1923년 7월 현재 군산 인구는 1만 7000여 명에 호수(戶數)는 4000여 호에 달하였다. 선박을 통한 이출(移出) 무역고(貿易高)는 2000만 원, 이입고(移入高)는 600만 원 이상으로 전 조선 제2항으로 부상하였다. 기생조합(권번)도 한호예기조합, 보성예기조합(보성권번), 군창예기조합 등 세 곳이 성업 중이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외지 출신 기생도 많았다는 것.
1921년 3월 군창예기조합 기생 이화중선(李花中仙), 김녹주(金綠珠), 초옥(楚玉), 산옥(山玉) 등과 남자 명창 김정문(金正文)은 대구예기조합 기생들과 함께 상경, 우미관에서 열린 연주회(17~24일)에서 다양한 공연(가야금 병창, 판소리, 창극 lt;춘향전 gt; 등)을 펼쳐 갈채를 받았다.-(관련 기사 lt;군산 기생들 경성 우미관에서 앵콜 공연 gt;)
기생 초옥 과 산옥 은 1923년 1월 lt;동아일보 gt; 신년 광고와 기사에서 박향월(朴香月), 장학선(張學仙) 등과 함께 발견된다. 군창예기조합은 1922년 12월 군산좌에서 열린 동광청년회 회관 신축기금 마련을 위한 연예회에 참석, 이화중선(20원), 이명옥(15원) 등과 함께 동정금 30원을 전달한다. 이후 몇 차례 보도됐음에도 조합 위치와 개·폐업 시기는 알 수 없어 아쉬웠다.
대구 기생들과 함께 경성 우미관 무대에 올라 박수갈채 받았던 김정문 명창과 명기 이화중선, 김녹주 연보(年譜)를 간략히 정리하였다.
명창 김정문(1887~1935)
1923년 lt;동아일보 gt; 신년 광고란에 군창예기조합 김정문(金正文) 이 보인다. 조합 대표인지 판소리 선생인지 정확한 직책은 알 수 없으나 1887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1920년대 명성을 떨친 명창 김정문 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한자 이름이 같고 태어난 해, 동선 및 공연 등이 그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기와 맞물려서다.
1921년 3월 경성 우미관에서 8일간(17~24) 열린 갈돕회 돕기 대연주회에 이화중선, 김녹주, 초옥, 산옥 등과 공연했음이 확인되어 신빙성을 더한다. 그가 군산에 기생조합을 설치한 뒤 기예가 뛰어난 동기(童妓)와 기생들을 스카우트하고 신문에 광고도 내면서 지역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펼치다가 중도에 그만둔 것은 아닌지 유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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