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3 October 2025
ohmynews - 9 hours ago
전쟁헌금 갹출 성과로 귀족에 준하는 대우 받은 친일파
의병의 도시를 자랑하는 천년도시 충주. 일제국주의의 조선침탈이 본격화된 19세기 말 까지만 하더라도 충주시는 충청북도의 중심도시였다.
1896년 고종이 행정구역을 13개 도(道)로 개편하면서 충청도는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분리됐다. 충북의 관찰부가 있는 도시는 당연히 충주였다. 그러나 청주시로 충북의 중심이 옮겨가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08년 순종은 칙령을 발표해 충주에 있던 관찰부를 청주로 옮겼다. 충청도 1000년 중심이었던 충주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충북의 수부도시 위상에서 멀어진 충주시는, 그 뒤로 쇠락을 거듭했다. 지금은 청주시 인구의 1/3 수준으로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충주시가 충북 제1의도시 위상을 잃게된 것은 일제의 조선강제병합과 깊게 연관돼 있다. 1908년 충북도관찰부가 청주로 옮기게 된 데에는 한 일본인이 통감부 내무차관에게 보낸 의견서가 계기가 됐다.
당시는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전이지만 이미 을사늑약과 정미조약을 통해 일제가 사실상 대한제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작성된 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 에 따르면 충북관찰부 일본인 서기관 카미타니 다카오(神谷卓男)는 통감부에 관찰부와 관련한 의견서를 보냈다.
카미타니는 의견서에서 조치원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청주가 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가장 적당한 곳이고, 주변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충주는 반란군의 근거지가 됐던 점 등을 들어 도청 이전을 제기했다.
전홍식 충주3·1운동기념사업회 대표는 2015년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 lt;식민통치전략과 도시공간의 변화. 일제시기 충주를 중심으로 gt;에서 충청북도 관찰부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한 것은 당시 최고 통치권자인 조선통감이 결정하고 통감부 차관과 충청북도 서기관이 담당자가 돼 실행에 옮겼다 고 분석했다.
일제침탈로 충청 제1의 도시 위상까지 빼앗겼건만...
충주의 오래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충주향교. 향교 입구 오른편 광장에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영원히 잊지 않고 기념하겠다)가 놓여있다.
영세불망비의 주인공은 전석영(全錫泳, 1893~?)이다. 창씨명은 松田圭生 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면장에서 시작해 28세에 중추원참의에 오른 고위 친일파다.
전석영은 누굴까? 일제의 광기어린 침략전쟁이였던 중일전쟁(일본식 표현=지나사변)이 시작된 1937년 8월 23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lt;매일신보 gt;는 전석영에 대한 기사를 싣는다.
lt;매일신보 gt;는 기사에서 (중일전챙을 지지하는) 시국강연회가 지난 8월 16일 충주경찰서 상무회관에서 개최됐다. 충주군수 전석영씨가 지나사변에 군민의 각오(覺悟) 라는 연제(演題=강연제목)로 일장의 열변을 토했다 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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